[이 아침에] 나 하나쯤이야
자주 다니는 프리웨이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큰 사거리에서 우회전해야 한다. 평소에는 주변을 살피다가 차가 오지 않으면 우회전하는데, 아침 출근 시간에는 초록색 신호등이 켜져야만 우회전할 수 있는 길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전까지는 그런대로 신호등을 지키며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차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뭐가 그리 급해졌는지 차들 대부분이 신호를 무시하고 우회전한다. 신호를 무시하고 줄지어 우회전하는 차들을 따르다 보면 내가 신호등 앞에 설 때가 있다. 눈치 보다 슬쩍 우회전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겠지만, 그래도 목사인데 나부터라도 법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신호가 바뀔 때까지 기다린다. ‘나 하나쯤이야’하는 마음으로 약간의 편리를 추구하기 위해 법을 어기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나 하나라도’ 교통법규를 준수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버티기도 쉽지 않다. 성미 마른 사람들이 누르는 경적에 놀라 등골이 오싹해질 때도 있기 때문이다. 살맛 나는 세상과 살기 힘든 세상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나 하나쯤이야’라는 마음으로 법을 어기고, 쓰레기를 버리고, 새치기하고,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는다면 살기 힘든 각박한 세상이 될 것이고, ‘나 하나라도’라는 마음으로 누가 보든 보지 않든 법을 지키고, 자연에 대한 예의를 차리고, 사람에 대한 책임을 다한다면 세상은 분명 살맛 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옛날 어느 왕이 신하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열었다. 왕은 신하들에게 가장 좋은 포도주 한 병씩을 가져오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각자 가지고 온 포도주를 이 항아리에 쏟아 함께 나눠 마시면서 우리가 모두 하나임을 보여줍시다!” 잔치가 열리는 날 진수성찬이 차려진 잔칫상에 신하들이 둘러앉았다. 왕은 큰 항아리에 담긴 포도주를 내오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신하들이 가져온 최고급 포도주를 모은 항아리에서 퍼온 것은 포도주가 아니라 맹물이었다. 신하들 모두 ‘나 하나쯤이야’하는 마음으로 포도주 대신에 물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었다. 이 아침에도 신호등 앞에서 ‘나 하나쯤이야 어떻겠어’라며 슬쩍 우회전하라고 꼬드기는 속삭임과 ‘나 하나라도 법을 지켜야지’라는 의연한 결단 사이에서 갈등하는 내 마음을 위로하는 시를 만났다. 조동화 시인의 ‘나 하나 꽃 피어’라는 제목의 시다.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그러고 보니 세상은 온통 ‘나 하나라도’라는 마음이 모인 곳이다. 나 하나쯤 꽃 피어 무슨 변화가 있겠느냐는 비관을 딛고, 나 하나라도 꽃 피우겠다는 희망이 모여 꽃밭을 이루었다. 나 하나쯤 떨어져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절망을 딛고, 나 하나라도 세상을 적시겠다는 용기를 낸 작은 빗방울이 떨어져 강이 되고 호수를 이루었다. 나 하나쯤 소리 낸다고 누가 알아주겠느냐는 좌절을 딛고, 나 하나라도 소리높여 노래하겠다는 기백으로 부르는 새들의 지저귐이 모여 새소리가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었다. ‘나 하나쯤이야’라는 마음을 ‘나 하나라도’라는 다짐으로 바꾸자. 그 다짐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조금은 더 살맛 나는 세상으로 만들 것이다. 이창민 / 목사·LA연합감리교회이 아침에 초록색 신호등 최고급 포도주 포도주 대신